노박 조코비치의 311주 최장기간 1위 갱신을 기념해 ATPtour.com 에 올라온 칼럼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천재 소년이 ATP역사상 최장기간 챔피언이 되기까지

1992년 6월, 깡마른 5세 소년이 세르비아의 작은 산골 마을 테니스장 울타리 뒤에 서서 유소년 테니스 교실을 구경하고 있었다. 코치인 Jelena Gencic 은 꼬마를 테니스 교실에 초대했다. 그녀는 재능을 가진 선수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Gencic는 커리어 초기에 모니카 셀레스를 코치하기도 했었다(* 셀레스는 현재 세르비아로 바뀐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그랜드 슬램 9회 우승 경력이 있죠). 첫번째 오후 수업을 마칠때쯤에 이미 Gencic는 셀레스가 세계적인 재능을 가진 선수인것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소년의 이름은 노박 조코비치였다. 세르비아 어로 Djokovic은 Djoko 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Djoko Damjanovic 이라는 조코비치의 친가쪽 선조 이름에서 내려온 이름. 부모는 테니스코트 길건너의 피자와 팬케익을 파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다. Chris Bowers 가 그의 저서 Novak Djokovic: The Sporting Statesman 에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Gencic은 바로 소년과 같이 레스토랑에 걸어가서 "당신 아들은 천재예요. 17살에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겁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박의 재능은 코치가 예견한것보다는 좀 늦게 피어났다. 17세에는 랭킹 515위에서 128위를 왔다갔다했으니. 하지만 당시 여건을 고려하면 Gencic의 예언은 상당히 대담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유고슬라비아는 산산조각난 상태였고, 발칸반도는 전쟁에 휩싸여 90년대 내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 당시 세르비아는 국민소득 2,767달러밖에 되지 않는 가난한 나라였다. 하지만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Gencic 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업적을 마주하고 있다. 별 대단할 것 없는 출신의 소년이 전쟁으로 찢긴 세르비아에서 나타나서, 이제 Fedex ATP 랭킹에서 311주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 테니스를 플레이한 어떤 선수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이다.

Gencic가 첫 레슨에서 알아챈 바로 그 재질이 조코비치의 놀랄만한 커리어를 이끌어온 바로 그 특징들이다. 풋워크와 집중력, 그리고 성공에 대한 갈망. 1973년 ATP 랭킹 제도가 도입된 이후 단 26명의 선수만이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챔피언들도 모두 존중받을 자격이 있지만, 노박 조코비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정상에 서고자 하는 갈망으로 굶주려 있었다.

조코비치는 때로는 상대방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면서, 힘차고 위풍당당하게 경쟁자들을 물리쳐왔다. 다른 플레이어들 흉내를 우스꽝스럽게 내기도 하고, 노박의 부모는 불가능해 보이는 예언을 하며 경솔하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결국 전부 현실이 되었다. 윔블던 센터 코트의 잔디를 뜯어먹기도 하고, 관중들에게 나의 재능을 인정하라며 시위하듯 승리 후에 프로레슬러처럼 셔츠를 찢고 또 때로는 키스를 날리기도 했다. 조코비치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발언하곤 했다.

 

 

2011년 7월 처음으로 랭킹 1위를 차지할때의 엄청난 상승세를 복기해보자. 조코비치는 호주오픈 우승으로 가는 길에 앤디 머레이와 로저 페더러를 꺾었다. 두바이에서 페더러를 다시 꺾고, 인디언웰스에서 페더러와 나달을 또 이겼다. 이 기세는 계속 이어져서 마이애미에서 나달을 이기고 다시 클레이시즌 마드리드와 로마에서 나달을 만나 또 이겼다. 마치 성난 괴수에게 간단히 눈가리개를 씌워 제압해버리는 듯한 위세였다. 윔블던 결승에서 나달을 또 이기며, 시즌을 48승 1패로 이어가면서 커리어 처음으로 랭킹 1위에 오른다. 잔디 몇 포기를 뜯어먹으면서.

"테니스 챔피언이 되는것, 이게 내가 태어난 이유다" 우승 이후 조코비치가 말했다. "다들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 것이다. 어떻게 전쟁으로 엉망이 되었는지..우리는 힘든 세월을 보냈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더 강해졌다"

윔블던 우승 이후에 조코비치는 세르비아 벨그라드에 환호를 받으며 금의환향했다. 10만명의 인파가 조코비치를 축하하기 위해 몰려나왔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그 우승에 안주하지 않았다. 랭킹 1위에 오른 후 몬트리얼과 신시내티 마스터스에서 연속 우승하고, 페더러와 나달을 꺾으며 US 오픈 우승을 차지해 테니스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시즌중 하나를 완성했다. 기세가 오를대로 올랐지만, 아직 최고의 플레이어들과 겨루며 쌓아갈 311주 중의 처음 몇 주를 보냈을 뿐이다.

조코비치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음미하려면 조코비치 이전 시대의 챔피언들뿐 아니라, 조코비치가 얼마나 강력한 상대들과 같은 시대를 헤쳐왔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1위 기간을 이어가는 레이스를 하는 챔피언들의 전당을 상상해보자. 출발선에는 100주 이상 1위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단 9명의 선수가 있다. 조코비치는 27세이던 2014년에 안드레 아가시 (101주), 라파엘 나달 (102주), 비외른 보리 (109주) 를 추월했다. 2015년에는 존 매켄로 (170주) 를 뒤로 보냈다. 이 시점에서 아직 지미 코너스 (268주), 이반 렌들 (270주), 피트 샘프라스 (286주), 그리고 로저 페더러 (310주) 가 한참 앞에 있다. 2014년 7월 7일부터 2016년 11월까지의 압도적 시기를 보내고 나서 (이때 전적은 말도 안되는 167승 17패이다!) 조코비치는 약간 트랙을 벗어나 특유의 헝그리 정신을 얼마간 잃어버린 듯했다.

조코비치는 부상으로 신음한 2017년 시즌에 메이저 타이틀을 하나도 따지 못했고, 2018년 여름에는 20위 밖으로 랭킹이 밀려났다. 나달, 부활한 페더러와 머레이, 그리고 다른 강자들을 보며 사람들은 31세의 조코비치도 이제 전성기가 지나버린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의심은 언제나 조코비치 내면의 불꽃을 다시 살려냈고, 조코비치는 2018년 윔블던과 US오픈에서 우승한다.

조코비치는 다시금 정상으로 가는 길에 올랐고, 2019년에 지미 코너스와 이반 렌들의 기록을 추월했다. 2020년에는 호주오픈 타이틀을 방어해냈고, 테니스 역사상 가장 이상하고 정신적으로 괴로운 시즌임에도 41승 5패를 기록하며 소년시절의 영웅이었던 피트 샘프라스의 기록을 추월했다. 런던 Nitto ATP 파이널에서 조코비치는 정상을 지키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어떻게 샘프라스가 6년이나 연속으로 연말 1위를 달성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며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조코비치는 "피트가 말한대로 1위 자리를 지키는것, 시즌을 1위로 마치는것은 우리 스포츠 최고의 성취이고, 그런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스스로 각오를 다잡고 자기의 인생을 바치는 엄청난 헌신이 필요하다" 라고 말했다.

 

 

그런 스트레스를 이겨 내면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동안 노박이 항상 쫓는 대어가 있었다. 로저 페더러라는 이름의. 조코비치는 커리어 내내 페더러의 뒤를 집요하게 밟아 왔다. 페더러는 22세에 처음으로 1위에 올랐고, 노박은 24세에 그것을 해냈다. 노박은 26세에 , 페더러는 24세에 100주간 1위를 달성했다. 300주 1위를 달성한것은 페더러가 31세, 노박이 33세 때이다.

아마 이제 역사상 어느 선수보다 많은 메이저 타이틀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코비치는 항상 페더러와 나달이 이미 밟은 길을 따라가는 처지였다. 페더러와 나달은 이미 수많은 열성 팬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당연히 그 팬들은 자기들 영웅들의 업적에 상처를 내는 조코비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필요할때는 언제든 자신의 게임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고, 그런 강적들을 꺾으며 조코비치는 오히려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커리어 초반에는 내내 저평가를 당했지만, 그래서 그 와중의 성취들은 더욱 달콤했다. 이제 결국 로저 페더러의 최장기간 1위 기록을 깬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 업적은 정말 테니스를 위한 평생의 노력과 희생, 헌신이 이루어낸 대업이다. 노박에게 이 기록은 이 세상 전부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 종목에서, 가장 많은 그랜드 슬램 우승을 하는것과 랭킹 1위에 가능한 오랫동안 머무는것 두 가지가 최고의 목표이다" 작년에 샘프라스의 기록을 뛰어넘으며 조코비치가 말했다.

조코비치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누구보다도 더 힘들게 일해야 했다. 커리어 초창기에는 서브로 쉬운 득점을 잘 하지도 못했고, 시속 90마일(145km/h)짜리 포핸드로 상대를 제압한다든지 하는 장면도 보기 힘들었다. 조코비치는 세계 정상급의 체력과 움직임을 바탕으로 올라운드 게임에 능하지만, 조코비치의 진짜 강점은 정신력에 있다. 중요한 포인트에서도 무서울만큼 침착하게 집중하는 능력, 타이브레이크에서 발동되는 락다운 모드 같은 것들이 조코비치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만들었다.

그의 업적에서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은 테니스의 황금 시대에 그렇게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어로 거론되는 두 명, 그리고 명예의 전당에 충분히 들어갈 만한 앤디 머레이, 후안 마틴 델 포트로, 스탄 바브린카, 도미닉 팀같은 선수들과도 경쟁하며 만들어낸 업적인 것이다. 조코비치는 페더러, 나달 뿐 아니라 지금 언급한 모든 선수들과의 상대 전적에서 앞선다.

지금 위치에 도달하는 동안 조코비치는 세르비아와 발칸반도에 엄청난 테니스 붐을 일으켰다. 현재 ITF 테니스 주니어 랭킹 100위 안에 7명의 선수가 예전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다(그 중 넷이 세르비아 출신). 

2021시즌에 접어들면서 예언가들이 팀이나 다닐 메드베데프같은 선수들이 1위 자리를 조코비치한테서 뺏을 수도 있다고 예측했지만, 조코비치는 보란듯이 메드베데프를 무실 세트로 제압하며 9번째 호주오픈 우승을 이뤘다.

조코비치 커리어의 끝을 예단하는 그런 부정론자들의 섣부른 예측을 조코비치가 듣는다면 아마 조심해야 할 것이다. 33세의 나이에 노박은 아직도 압도적인 폼을 유지하고 있다. 건강과 식이조절, 요가에 바치는 정성으로 볼 때 앞으로 몇년간은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노박은 페더러보다 6살이 어린데, 페더러가 겪은 에이징 커브를 따라가며 몇년간 더 플레이한다고 생각하면 1위 자리를 노리는 다른 선수들은 신경이 많이 쓰일 것이다.

 

 

그런데 조코비치가 과연 311주를 훨씬 넘어 1위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싶을만큼 계속 굶주려 있을 것인가? 아직 깨야 할 기록들은 남아 있다. 페더러와 나달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 기록에는 2개가 모자라고, 지미 코너스의 투어 109회 우승을 넘어서려면 28번의 우승이 더 필요하다. 페더러와 나달도 아직 완전히 은퇴한 것이 아니기도 하고. 결국 기록을 세우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조코비치는 커리어 내내 최상급의 꾸준함을 보여 왔다.

어떤 경우든, 심지어 이제부터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이미 조코비치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다. 투어 생활 초기에는 체력도 지금처럼 좋지 못했고 경기에서 기권해야 했던 경우도 많다. 한번은 자기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고 페더러와 나달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는 듯한 암시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노박은 가장 터프하고 강인한 멘탈을 가진 선수로 진화해 갔다. 테니스 인프라는 거의 없는, 전쟁으로 망가진 나라에서, 테니스 선수 가문도 아닌 평범한 집안 출신인 조코비치가 이룬 것들을 생각하면 다음 위대한 챔피언도 세계 어느 곳에서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Gencic가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기는 했지만 조코비치는 태생부터 챔피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싸워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다. 

"테니스의 전설, 거장들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정말 나를 흥분시킨다" 라고 조코비치는 말한다. "내가 어린시절의 꿈을 좇아 오면서 그런 전설들 사이에 한 자리를 스스로 얻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한다면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아름답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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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생각보다 엄청 오래 걸리네요. 가볍게 시작했다가 고생했습니다. 사실 페더러의 오랜 팬으로서 본문에 나온 것처럼 저도 노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곱씹어 보니 정말 얼마나 엄청난 노력과 얼마나 강한 멘탈로 커리어를 쌓아올린것인지 존경심이 듭니다. 페더러와의 2019년 윔블던 결승전을 라이브로 보다가 현자타임이 정말 세게 와서 그 경기는 아직도 못 보고 있는데, 이제 시간이 좀 흐르니 좀더 객관적으로 경기를 다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좀 드네요.

여튼 앞으로도 건강하게 몇년은 더 플레이를 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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